지속되는 빛

 

서이제 작가

 


 문이 열린다. 

 문이 닫힌다.

 늦을까 봐 서둘러 가고 있다. 


 일산대교에서 팔당대교에 이르기까지, 한강에는 총 서른한 개의 다리가 있다. 나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고,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밤의 꿈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강을 건너고 있다. 건너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보고 있다. 풍경이다. 빛, 금빛, 63스퀘어, 여의도 한강공원, 물결,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과 달리는 자동차들, 가로등 불빛과 헤드라이트, 원효대교 너머 일몰 푸른빛 분홍색 구름 흐르는 구름 붉은빛, 그라데이션. 빛 반사 빛 먼지 빛 번짐 빛나는 사람들. 다들 어디로 가는 풍경이다. 여기는 저기로 이어진다. 이어지고 있다. 

 

 

6월 20일 

 내가 나를 찾아와, 꿈은 꾸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꿈을 꿨어.

어떻게 내가 나를 찾아올 수 있었는지 궁금해.



3월 29일

 애초부터 꿈같은 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학에 가는 게 꿈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대학생이 되는 순간 대학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게 아니야.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내 삶을 부정하면서, 나는 조금씩 내 자리를 옮겼어.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야. 그것만은 확실해. 나는 그런 식으로 삶을 부정하면서, 내 자리를 옮겨가고 있어.



5월 30일

 수업에 가지 않았다. 수업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었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분명 있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해왔던 걸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를 그만둬야겠다. 결심했고, 결심했으니, 나는 결심한 대로 하면 되는데. 나는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7월 27일

 그 누구도 읽지 않을 글을 쓴다. 나는 일기라고 불러도 좋을 글을 쓰고 있지만, 동시에 일기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읽다가 지겨워지면 아무도 읽지 않을, 그런 글을 쓰고 있다.



8월 14일

 나는 너에게 연락을 했다. 1년 만이었다. 평소에 연락도 없었던 내가 너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집을 구할 때까지만 함께 살아도 되냐고 물었더니, 너는 흔쾌히 그러라고 말했다. 그리고 취직 축하한다고. 스스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건 좋은 일이라고. 너는 내게 말했다. 고마웠다. 너는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너에게는 꿈이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풍경이다. 나는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가 보였어. 그러니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가 보였어. 나는 감색 코트를 입은 나에게 다가갔다. 나는 나를 너라고 불렀어. 너는 나를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말했고, 나는 너를 오래도록 기다렸다고 말했지. 마치 내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네, 하고 너는 말했어. 나는 내가 할 소리를 네가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서로 자신에게 말하듯, 말을 주고받았어. 



11월 12일

 사람은 취미를 가지는 게 좋대.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너에게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너는 매일 운동을 했지만 그걸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너는 공부를 하려면 건강해야 한다고, 그래서 운동을 하는 거라고 했다. 공부뿐만 아니라, 뭐든 하려면 건강해야지. 우리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9월 2일

 시험에 합격한다면, 너는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햇살이 잘 드는 카페 창가에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늦잠을 자고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저녁이 되면 한강으로 산책을 나가고 싶다고 했다. 만약 시험에 합격한다면, 공무원이 되면, 그날이 오면. 너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에 대해 자주 말했고, 모든 것을 뒤로 미뤘다.



10월 4일

 사람들은 거리에 서서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시작될 거야. 너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불꽃축제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다들 불꽃을 보겠다고,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온 거야. 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여의도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노량진 학원 어디서든 63빌딩이 보여. 우리도 거리에 서서,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63빌딩이 보였다. 이내 하늘 위로 폭죽이 쏘아 올려지고, 하늘을 수놓는 불꽃. 환호소리. 행복. 너는 그 속에서 분명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의 얼굴은 빛났는데. 너는 돌아오는 길에 말했지. 불꽃을 보러 가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든다고. 불꽃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든다고.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시험이어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게 시험이 아니라서 죄책감이 들어. 너는 죄책감을 느꼈고, 나는 죄책감에 대해 생각했다. 어째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는지.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2월 28일

 다녀올게. 네가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이 닫힌다.

 문이 닫힌 후, 너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너는 건강하게 살고자 운동을 시작했다. 그날 네가 운동을 가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운동을 쉬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너는 건강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는 건강하게 살고 싶었어. 잘 살고 싶었어. 그건 우리 모두의 꿈이었어. 그날 문이 닫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금 더 오랫동안 함께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문은 닫혀있다. 나는 문을 바라보지만,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문을 열 수 없다.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열 수 없고, 알 수 없다. 네가 없다. 네가 없어서, 나는 네가 없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7월 10일

 생각만 하기. 생각으로만 살기. 이게 사는 걸까. 생각하며, 그런 식으로 삶을 이어나가기.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



3월 2일

 시간을 다 허비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슬퍼만 했지. 내가 나를 연민했고, 나만 나를 가엾게 여겼어. 내가 나를 가엾게 여겨봤자 소용없어. 소용없다는 걸 알아.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그러니까 슬퍼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나조차도 나를 말릴 수 없어. 누구나 현명한 생각을 할 수 있어. 다만, 누구나 생각한 대로 살지 못할 뿐이야.



 너와 여의도 한강공원을 걸었다. 너는 나에게 지난밤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는 내가 하려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래도록 꿈을 꿨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든 게 기억나진 않아. 모든 장면들은 조각나있어. 이미지 조각들. 나는 그 장면들을 이어붙이면서 그것이 나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지. 이미지 조각들을 이어붙이면서 하나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어. 나는 내 기억을 왜곡하면서, 시간을 뒤바꾸고 있어. 다시 살고 있어. 계속. 너는 내가 하려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네가 하려던 말을 한다. 곧 시작될 거야. 오늘은 불꽃축제가 있는 날이야. 불꽃놀이 보겠다고, 다들 여기로 나온 거야. 이내 하늘 위로 폭죽이 쏘아 올려지고, 하늘을 수놓는 불꽃. 환호소리. 행복. 기시감이 들어. 그런데 죄책감이 없어. 



9월 31일

 날씨가 쌀쌀해졌다. 옷 정리를 했고, 예전에 즐겨 입었던 코트를 꺼내 입었다. 감색 코트.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샀던 코트였다. 코트 잘 어울리네. 언젠가 너는 내게 말했지만, 사실 이 코트는 나보다 너에게 더 어울렸어. 너는 종종 내 코트를 입었고, 늘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두었지. 코트에서는 담배 냄새와 비누 냄새가 섞여서 났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어. 오랜만에 꺼내 입은 코트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고,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6월 8일

 누구나 소중한 사람을 잃어. 나는 내 슬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나를 방치하고 있다. 슬퍼하는 내가 너무 귀찮아. 자꾸만 우울감에 빠져드는 내가 귀찮아. 내게는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해야 하니까. 나도 살아야 하니까. 누구나 소중한 사람을 잃어.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애초에 소중한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 거야.



6월 12일

 문이 닫힌다. 그날 네가 무언가 놓고 갔더라면, 그러니까 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을 놓고 갔더라면, 아니, 중요하지 않더라도 무언가 놓고 갔더라면, 그걸 내가 발견했더라면, 내가 사실을 알리려고 급히 문을 열고 너를 불렀더라면, 네가 너무 빨리 가버렸어도, 내가 너를 따라갔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10월 21일

 내가 모르는 사람이 죽었고, 내가 아는 사람이 죽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나는 살아서 이 자리를 지켰어. 여전히 생활은 지속돼. 생활은 지속되고, 생활은 지속된다.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 이건 관성 같은 거야. 끔찍하지 않니. 오늘도 누군가 세상을 떠난, 이별의 날이야. 내일도 그렇겠지. 그렇지만 나는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 내일도 그렇겠지.



12월 2일.

습관적으로. 지속된다. 살기를 반복한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기억 속에 내가 있어. 내가 나를 보고 있다면, 그건 꿈이거나 기억이야. 꿈속에서 나는 관찰자야. 기억 속에서 나는 감상자야. 나는 고개를 돌려 너를 보았다. 내 얼굴이다. 너는 내 얼굴을 하고서 말한다. 오래도록 꿈을 꿨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든 게 기억나진 않아. 모든 장면들은 조각나있어. 이미지 조각들. 나는 그 장면들을 이어붙이면서 그것이 나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지. 이미지 조각들을 이어붙이면서 하나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어. 너는 내 얼굴을 하고서 말하고 있다. 기시감이 든다. 그건 아까 네가 했던 말이잖아. 기시감이 든다. 너는 내 얼굴을 하고서 말하고 있다. 기시감이 든다. 그건 아까 내가 했던 말일까. 기이하다고 생각한다. 느낀다. 왠지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꿈속에서 꿈을, 그 꿈속에서 꿈을, 그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나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너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다. 강물 위에 도시가 비치고 있다. 63스퀘어, 달리는 자동차들, 가로등 불빛과 헤드라이트, 가로등. 불빛, 불빛. 강물은 도시를 재현한다. 나는 너를 재현하고 있다. 



8월 8일

 스무 살이 되면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이십대가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게 많을 줄 알았어. 대학가는 늘 밝았고, 그 속에 내가 있게 될 줄 알았어. 도대체 지금껏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서른 살이 되면 해보고 싶은 게 많아. 이제는 밝은 곳에 내가 있었으면 해.


 

10월 21일

 내가 모르는 사람이 죽었고, 내가 아는 사람이 죽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나는 살아서 이 자리를 지켰어. 여전히 생활은 지속돼. 생활은 지속되고, 생활은 지속된다.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 이건 관성 같은 거야. 끔찍하지 않니. 오늘도 누군가 세상을 떠난, 이별의 날이야. 내일도 그렇겠지. 그렇지만 나는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 내일도 그렇겠지.



4월 22일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 잠을 잘 수 없게 만든다. 그런 강박이. 잠을 자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런 강박이. 오히려 잠을 잘 수 없게 만든다. 너는 늘 나보다 늦게 잠들고 나보다 일찍 일어났다. 내가 잠들 때도, 너는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때 너는 편히 잤을까.



1월 23일

 늦잠을 자버려서, 급히 준비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 때문에 현관문이 쿵 하고 닫혔는데, 그 소리에 잠깐 멈칫했다. 왜일까.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나는 네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날의 네가.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그날의 네가. 나는 닫힌 문을 뒤로하고,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그러니까 회사에 늦을까 봐 서둘러 가고 있는 동안, 나는 네가 된 것 같았다. 네가 무사히 살지 못했던 그 하루를, 내가 살고 있었다.



6월 20일 

 내가 나를 찾아와, 꿈은 꾸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꿈을 꿨어.

어떻게 내가 나를 찾아올 수 있었는지 궁금해.



 꿈은 꾸지 않는 게 좋아. 지난밤의 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지난밤, 지난 꿈, 지난 후회, 지난 삶, 지나간 것들이 그대로 지나가버릴 수 있도록 내버려 둬.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났던 곳에서 헤어지고 있다. 너는 내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고 있어. 

 

 스크린도어 문 닫히면서, 우리는 헤어지고 있다. 

 우리는 나눠지고 있다. 

 

 전철은 달린다. 나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고,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밤의 꿈에 대해 생각하면서 건너고 있다. 건너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지나간 것들이 그대로 지나가버릴 수 있도록 내버려 둬. 지나간 것들이 그대로 지나가버릴 수 있도록, 나는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다. 어쩐지 꿈속에 있는 것 같아. 나는 생각했고,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보고 있다. 풍경이다. 모두 다 지워지고 있는 것만 같아.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아. 점점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어. 밝은 빛 속에서. 눈부시게. 빛 반사 빛 먼지 빛 번짐 빛나는 사람들. 저기는 여기로 이어지고, 나는 오랫동안 닫히지 않는 긴 문을 통과하고 있어.



9월 12일 

 언젠가 우리는 노량진 길거리에서 불꽃을 본 적 있었어. 너는 꼭 시험에 합격할 거라고 했지. 너에게는 꿈이 있었고, 나는 꿈속에서 네가 돼.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을 밝히는 불꽃을 봐.